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문단 편집) ==== 북한의 대응 ==== 북한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미국이 강하게 나설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민이 외국인에 의해 살해 당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가이며, 이들에 대한 처벌로 전쟁도 불사하는 국가이다. 애초에 미국 내부의 여론도 군인에게 매우 우호적이며, 특히나 미국인들에게 악명 높은 IRS의 눈 밖에 나거나 살인마, 마약사범처럼 여론을 등질 범죄자가 아닌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예우 받는 현역 장교를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죽였으니, 당연히 뒤집어질 것을 북한이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미국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자국민 보호라는 매우 당연한 수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위상에 먹칠을 할 수 있다는 인식도 한 몫 한다. 애초에 미국의 저런 태도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제외하면 [[제1차 세계대전|1차대전]] 참전 원인 중 하나인 [[무제한 잠수함 작전|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제2차 세계대전|2차대전]] 참전의 직접적 원인인 [[진주만 공습]], 베트남전 발발 원인으로 삼았던 [[통킹만 사건]], 판문점 사태 이후긴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이던 [[9.11 테러]] 등 미국의 전쟁 발생 중 다수는 자국민 희생이었다. 그나마 미국 측이 나무를 자르는 동안, 심지어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초소에 침입해 불을 지르고 온갖 난장판을 만들고 있을 때도 [[빤스런|대응은 커녕 초소를 비우고 도망쳤다]]. 김정일 주도설을 제기했던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미군 장교를 죽일 정도로 막나갈 것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본때를 보여주되 총기는 일체 사용하지 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김정일은 사살이 아닌 단순히 미군을 도발, 어느 정도 구타하여 자신의 권력 장악과 체제 선전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일어났던 [[헨더슨 소령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푸에블로호 사건처럼 미국이 국제 정세상 힘들 때 대충 북한을 인정해 주면서 타협하려고 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으므로, 김정일도 이 기회에 후계자를 확고히 하고 당 내부에서는 지지도를 얻으며 크게는 체제 선전을 통해 정치 권력을 확고히 하려고 했을 것이다. 총기 대신 도끼로 저런 미친짓을 할거라고는 감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에서 미군 장교를 둘이나 살해했다는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자 김정일을 포함한 수뇌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한다. 김정일은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군 장교가 북한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한 김일성이 노발대발하면서 이런 짓을 왜 했느냐고 질책했다. 이에 김정일은 "[[피해자 코스프레|미군의 의식적인 도발이다. 저들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도발했다]]."는 뻔뻔한 거짓 보고를 올렸다. 당 비서들은 차마 김정일이 시켰다는 말은 못 하고 인민무력부 놈들이 미쳐서 그랬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극대노하여 인민무력부장 [[최현(북한)|최현]]을 불러서 쌍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고, [[내리갈굼|김정일의 죄를 뒤집어 쓴 최현은 역시나 열 받아서 작전국장을 불러서 조지고 책벌]]했다고 한다. 상기된 대로 미국의 보복 작전이 준비되자, 김일성은 "사람이 죽었으니 유감을 표명하라. [[푸에블로호 피랍사건|푸에블로호 사건]] 때도 미국이 사과를 했지 않았는가?"라는 면피성 지시를 내렸다. 다만 북한은 이 사건을 좀 더 정치적으로 써먹고는 싶었는지, 몇 시간 뒤에 [[스리랑카]]에서 진행 중이었던 비동맹회의에서 "이 사건은 미국놈들 탓이다."라며 한미 연합군을 질타하는 결의안을 제안했고 결국 승인되었다. 이후 사건의 주동자가 누군지 확실하게 밝혀지자마자 정세는 확실히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섰다. 상술했듯이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이 신문에 실리자마자 가해자는 북한, 피해자는 미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 북한은 긴급하게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고, 결국 김일성이 직접 유감 성명을 표했다. 처음 미국은 "유감 성명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거부했다가 하루 지나서 결국 수락했다.[* 이는 아직까지 소련이 건재한 상황에서 정말로 끝까지 나간다면 [[3차 세계대전]]이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내다버린 자식 취급하고 있었지만 미국이 보기에는 엄연히 공산국가를 자처하는 이상 소련은 공산국가의 수장으로서 북한을 지원할 것이 뻔했고,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아직까지 반전 여론이 강한 상황이었다. 만일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유감 성명을 받아들였던 [[제럴드 포드]]와 다르게 [[닉슨 독트린]]을 깨버린 채 푸에블로호 복수를 천명하였을 테고, 북한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미국이 쳐들어올까 봐 쫄아서 1년 동안이나 준전시 체제를 유지했고, 미군은 일단 폴 버니언 작전 병력들을 철수시켰지만 이후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대결이 일어났다. 이 당시 북한에게는 같은 공산권인 소련과 중국이라는 동맹이 있기는 했으나, 당연하게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이 벌인 정신 나간 행위에 전쟁을 벌여줄 의사 따위는 없었다. 하물며 소련과 중국이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 '''바로 [[제3차 세계 대전|3차 대전]] 개전이다.''' 당연히 최소 수백만 명은 희생당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서로 극심하게 대립하기는 했지만, 소련의 [[베를린 봉쇄]] 실패와 더불어 양 세력 간의 [[핵무기]] 경쟁으로 인해 전면전만큼은 피하기 위해 긴장 수위를 어느 정도 조절했다.[* 이러한 외적 요인도 있지만 때마침 미국, 소련, 중국 3국 모두 각자 전쟁을 피하려 했던 내적 요인도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이 패배로 끝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반전 여론이 거셌기에 전쟁 운운했다가는 그야말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상황이었다. 소련의 경우에는 이미 소련의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김일성 때문에 북한에 대해 반쯤 손을 놓은 상태였으며, 이 시기 [[동유럽]]에서 한창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그걸 탄압하는 동유럽 군부 정권들을 지원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문화대혁명]] 끝무렵이긴 했으나 이미 나라는 개판이 되어 있었고,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부수는 [[홍위병]]들의 병크로 인해 전쟁은 커녕 당장 내부 정리에도 급급해서 북한을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 [[6.25 전쟁|한국 전쟁]] 때도 소련의 지원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미국은 모른 체했고,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이웃 [[캄보디아]]나 [[라오스]]까지 작전을 넓히고 자기 앞마당 [[남미]]에서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델타포스까지 동원해서 몰아내도 소련은 침묵했다. 그런데 전시 긴장 상태인 위험한 장소에서 고작 나무 한 그루 때문에 미군, 아니 UN군 장교를 죽이고 전쟁 위기를 불러온 북한의 이 정신 나간 짓거리는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욕 보인 행위였다. 실제로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니들이 잘못한 거 맞잖아? 빨리 사과나 해"''' 라고 일갈하는 등 냉정하게 반응했다. 미군이 동원한 전력이 고작 12,000명의 지상군 증파만으로는 북한 전역을 점령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북한의 주요 시설을 공중 폭격으로 손보고 휴전선이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갈 저력은 됐다. 이에 북한은 총동원령을 내려 [[대학생]]들을 군에 동원했으며 [[조선인민군 준군사조직|노농적위대, 교도대 등의 예비군]]들도 모조리 동원했다. 심지어 [[김평일]]은 이 사건 직후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들을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 전 학생들의 군 입대를 독려했고, 그 자신이 제일 먼저 그 자리에서 인민군 육군에 입대함으로써 군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제대한 장교들도 60세 미만은 전부 다 군으로 복귀했고, 생산 시설들을 후방에 옮길 준비가 착수되었다. 또한 [[평양]]과 [[황해도]], [[강원도(북한)|강원도]]의 최전방지대 주민들의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노약자와 성분 불량 계층을 [[함경도]]로 이주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해당 지역은 완전히 난리통이었다고 한다.[* 소개 작업은 김정일의 지시로 [[국가안전보위부|국가정치보위부]]가 주도했으며, 평양에 주민소개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어 [[장성택]]이 모든 작업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한다. 8월 말부터 11월 중순에 걸쳐서 20만 명의 주민들이 이주되었고 황해도, 강원도에서 8천 세대의 성분 불량자와 노약자들이 '솎아졌다.' 작업은 은밀하고도 강압적이기 그지없었는데, 보위부원들이 소개장을 전달하며 정해진 시간까지 짐을 싸라고 지시한 후, 옆집도 모르게 온 식구를 실어 날라버렸다고...] 8~11월까지 석 달 동안은 모든 군인들이 [[군장]]을 싸놓고 잠을 잤다고 하며, 노동자들도 직장에서 나와 전투 위치로 배치되었고 대학생들도 건장한 사람들은 죄다 인민군에 끌려가서 사실상 [[휴학]] 상태에 들어갔다. 너무도 급한 소개 작업 때문에 식량 문제가 심각했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